“준우승에 만족이요? 이제 시작입니다.”

호주에서 이룬 영광은 이미 잊은 듯했다. 27년 만의 아시안컵 결승 진출에 성공했으니 뽐낼 만도 했건만, 오히려 당시에 발견하지 못했던 작은 티를 끄집어내느라 바빴다.

울리 슈틸리케 축구대표팀 감독(61)은 4일 취재진을 만나 아시안컵 뒷얘기를 털어 놓으며 “대회가 끝났으니 어떻게 우리 축구를 완성해갈 지가 고민의 전부”라며 “팬들의 기대치가 높아졌으니 더 노력하는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준우승?…경기 내용은 불만

슈틸리케 감독의 냉정한 태도는 아시아 축구의 변화를 직접 체험했기 때문이었다. 한국 축구가 아시안컵에서 챙긴 성적표는 5승1패. 개최국 호주와의 결승전(1-2 패)만 뺀다면 5경기를 전부 무실점으로 이겼다. 박수갈채를 받을 만한 결과지만, 감독의 생각은 달랐다. 아시아를 넘어 세계 무대를 넘본다면 보완해야 할 부분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슈틸리케 감독은 대회 전반을 되돌아보며 “한국이 한참 위에 있고, 나머지 국가들이 따라오는 상황은 이미 지났다고 본다”며 “이번 대회에서 한국이 이긴 경기들을 보면 힘겹게 이긴 경우가 너무 많았다. 조별리그 2차전 쿠웨이트와의 경기(1-0 승)에선 상대 슈팅이 골대를 때렸고, 우즈베키스탄과 8강전(2-0 승)에서는 문전 앞 3m거리에서 상대가 골을 넣지 못했을 뿐”이라고 지적했다. 실제로 슈틸리케 감독은 이번 대회 공식 기자회견에서 외신 취재진의 ‘한국의 수비 조직력이 강해서 무실점인가? 아니면 상대 수준이 낮기 때문인가?’라는 질문을 받고 한숨을 내쉰 적도 있다.

슈틸리케 감독이 야심차게 내놨던 ‘점유율 축구’도 실망스럽긴 마찬가지였다고 스스로 비판했다. 논리적으로 따진다면 볼 점유율이 높은 팀이 기회를 더 많이 창출하고 경기를 지배해야 하지만, 정작 우리는 반대였다는 것이다. 실제로 한국은 볼 점유율이 70%에 육박했던 조별리그 경기는 부진했던 반면 점유율이 30%대로 추락한 경기들을 이겼다. 슈틸리케 감독은 “점유율이 높아도 기회를 창출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며 “점유율이 높았던 경기를 살펴보니 대부분 우리 진영에서 공을 갖고 있더라”고 말했다.

슈틸리케 감독의 불만은 잦은 ‘백 패스’로 이어졌다. 경기를 뛰는 선수들 중에서 가장 발 기술이 나쁜 골키퍼에게 왜 자꾸 패스를 하느냐는 얘기다. 슈틸리케 감독은 취재진을 향해 “호주와의 결승전 첫 실점 장면에서 무엇이 기억나는지 묻고 싶다”며 “실점 장면만 따진다면 기성용(26·스완지시티)의 수비 가담이 늦었던 것도 문제지만, 그 이전에 불필요한 백 패스 등으로 볼을 잃어버린 장면 두 가지가 문제였다. 난 감독으로 이런 상황들을 면밀히 고쳐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2002 한·일월드컵 당시 백 패스 금지령을 외쳤던 거스 히딩크 전 대표팀 감독(69)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슈틸리케 감독은 굳건한 정신력과 비교해 정교하지 못한 기술도 개선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슈틸리케 감독은 “우리 선수들이 정신력과 자세는 뛰어나지만, 기술적으로 부족한 것은 사실인 것 같다”며 “위협적인 장면을 만들어내는 마지막 패스, 골문으로 쇄도하는 선수의 머리로 떨어뜨리는 정확한 크로스, 중원에서 양 쪽 측면으로 벌릴 수 있는 40~50m 롱패스의 정확성 등이 아쉬웠다. 선수들이 이런 부분을 개선하려면 매일 매일 기술을 연마해야 한다. 대표팀이 아닌 소속팀으로 돌아가서도 잊으면 안 되는 대목”이라고 당부했다. 이어 슈틸리케 감독은 “대표팀에서 일부러 비디오 미팅을 자주하는 것도 선수 스스로가 자신들의 부족한 부분을 깨달으라는 의미”라고 덧붙였다.

■아시안컵 멤버라고 보장은 없다

안주가 아닌 발전을 요구한 슈틸리케 감독은 아시안컵 멤버라고 국가대표를 보장하는 일도 없을 것이라고 선을 그었다. 슈틸리케 감독은 “이번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낸 선수들이 계속 뽑힌다고 말할 수는 없다”며 “부족한 부분을 채우려면 어떤 변화가 필요할 것인지 상황을 지켜봐야 한다”고 말했다.

이번 대회에서 무명의 설움을 떨쳐낸 이정협(24·상주)도 예외는 아니었다. 슈틸리케 감독 본인이 발굴해 이번 아시언컵에서만 2골을 터뜨리는 활약을 펼쳤지만, 아직 부족한 구석이 많다고 했다.

슈틸리케 감독은 “이정협은 분명 모든 지도자가 함께 하고 싶은 유형의 선수다. 자신에게 요구되는 플레이를 잘 이해하고 경기장에서 이를 수행하려 노력한다”며 “그러나 이정협이 군데렐라(군대에서 온 신데렐라)라는 별명에 현혹되면 안 된다. 벌써 본인이 스타가 됐다고 생각하는가? 진짜 스타가 되려면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어 슈틸리케 감독은 “이정협은 직선적인 플레이와 공중볼 경합에는 능한 선수다. 특히 호주전에선 득점은 없었지만 대회 최고의 활약을 펼쳤지만 기술적인 부분에선 더 많은 발전이 필요한 게 사실”이라고 덧붙였다.

슈틸리케 감독은 ‘제2의 이정협’이 계속 나올 것이라는 경고도 내놨다. 비록 이번 아시안컵에는 데려가지 않았지만 제주 전지훈련에서 시험대에 올렸던 선수 일부는 오는 3월 27일과 31일 두 차례 예정된 A매치 2연전에서 새 얼굴로 등장할 것이라는 의미다. 슈틸리케 감독은 “아무래도 실전이 아니라 평가전인 3월 A매치는 조금 더 여유를 갖고 실험에 나설 수 있는 기회”라며 “아시안컵에 앞서 전지훈련을 치렀던 제주도에서 유심히 지켜봤던 선수들이 2~3명 있다. 이 자리에서 이 선수들의 이름을 밝히면 부담을 가질 수 있어 함구하겠지만, 이 선수들이 차기 시즌 좋은 활약을 펼친다면 바로 발탁할 것”이라고 말했다.

여기에 아시안컵에서 낙마했던 박주영(30·알 샤밥)을 비롯해 이동국(36·전북), 김신욱(27·울산) 등도 다시 태극마크를 달 경우 대표팀은 어느 때보다 치열한 경쟁 구도가 형성될 것으로 보인다. 슈틸리케 감독은 “박주영을 굳이 뺄 필요는 없다. 계속 살펴볼 것”이라며 “차두리(35·서울)가 그 나이에 아시안컵과 같은 큰 대회에서 좋은 활약을 보여줬다. 이제 대표팀은 나이가 아닌 실력에 맞춰 꾸려가고 싶다”고 말했다.

■‘늪축구’ ‘실학축구’ ‘갓틸리케’ 등의 말에는 부담

슈틸리케 감독은 자신을 둘러싼 지나친 기대와 오해에도 부담감을 호소했다. 대회 내내 한국 축구의 트레이드 마크로 불린 ‘늪 축구’(어떤 강팀도 한국을 만나면 늪에 빠진 것처럼 무기력해지는 축구)를 비롯해 다산 정약용에 빗댄 ‘실학 축구’, 화려한 용병술에 붙은 신(神·갓)에 빗댄 ‘갓틸리케’ 등의 말에 대해선 “내 나이가 환갑이다. 그런 말은 민망하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원래 감독이 주목받으면 안 된다. 축구에서는 선수들이 주인공이 돼야 한다. 내가 바라는 이상적인 감독상은 우리가 정말 멋진 축구를 보여주고 ‘이 팀의 감독이 누구냐?’는 질문을 받는 것”이라고 말했다.

뚜렷한 전술과 패턴이 눈에 띄지 않는다는 비판에 대해서는 “대회 내내 4-2-3-1 포메이션을 그대로 가져간 것은 맞다”며 “하지만 포메이션은 숫자에 불과하다. 남들이 다 알아챌 수 있는 뻔한 전술보다는 우리한테 지고도 패를 쉽게 확인할 수 없는 전술이 낫지 않나 싶다”고 말했다. 그는 호주와의 결승전에서 박주호(28·마인츠)를 수비형 미드필더에서 왼쪽 측면 미드필더로 바꿨고, 최후방 수비수 곽태휘(34·알 힐랄)를 최전방으로 끌어올리는 변화를 주기도 했다.

더불어 슈틸리케 감독은 “조금 더 욕심을 낸다면 그저 텔레비전으로 중계되는 축구가 아니라 국민들의 마음에 와닿는 축구를 하고 싶다. 이번 대회에서 그런 축구를 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앞으로도 더 발전된 모습으로 국민들의 관심을 받고 싶다”고 말했다.

■목표는 FIFA 랭킹 30위권

슈틸리케 감독은 한국 축구의 청사진도 내놨다. 애초 러시아월드컵 16강 등의 목표를 내세울 것으로 예상됐지만, 뜻밖에도 국제축구연맹(FIFA) 랭킹 30위권을 지목했다. 8회 연속 월드컵 본선에 진출한 국가의 자존심을 지켜야 한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월드컵 본선에는 32개국이 참가하기 때문이다.

1993년 도입된 FIFA 랭킹은 매달 209개 회원국들의 4년간 A매치 결과에 따라 순위를 매기는 일종의 통계 자료다. 한국은 1998년 17위까지 올라갔지만, 이후 추락을 거듭해 69위에 머물고 있다.

슈틸리케 감독은 “이번 아시안컵에서 준결승까지 5연승을 달렸으니 랭킹이 많이 올라갈 것이라 생각한다. 현재 60위권이지만 50위권 안에 들어갈 수도 있다. 그러나 만족하면 안 된다. 장기적으로 볼 때는 한국 축구가 30위 안에 들어가야 한다”고 말했다.

슈틸리케 감독은 아시안컵에서 그 가능성을 확인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호주에서 우리 선수들을 지켜본 결과 규율과 의지 등 정신적인 부분이 긍정적이었다. 공을 갖고 있을 때 조금 더 위협적인 장면을 만들어내고 적극적인 플레이를 한다면 가능성이 높다”고 자신있게 말했다.

슈틸리케 감독은 오는 6일 자택이 있는 스페인 마드리드로 휴가를 떠나 K리그가 개막하는 다음달 7일 이전에 돌아올 계획이다.